(작성: 2018.06.11)
15세 소년 듀크는 학교 농구 시합에서 3점짜리 골을 세 번이나 성공시켰다. 듀크는 뿌듯해할 엄마와 아빠, 동생을 상상하며 신이 나서 집으로 향했고, 바로 그때 증세가 찾아왔다. 목과 혀가 붓기 시작하며 기도를 점차 막기 시작했고, 듀크의 숨은 점점 가빠졌다. 듀크는 일초, 이초, 막혀오는 숨을 어렵게 내쉬며 가방 속에서 에피펜을 꺼내 허벅지에 주사했고, 즉시 깊고 편한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에피펜은 이처럼 치명적인 알레르기 반응 시 사용하는 응급 자동 주사제이다. 듀크는 혹시라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에피펜을 세 개씩 가방에 넣고 다녔지만 이제 듀크의 가방에는 단 한 개의 에피펜만이 있을 뿐이다. 제약사가 약값을 500퍼센트 인상했기 때문이다.
마틴 슈크렐리는 임산부와 에이즈 환자에게 치명적인 톡소플라스마증 치료제인 다라프림을 15,000원에 사들인 후 약가를 90만원으로 5,000퍼센트 인상한다.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띠며 세상을 조롱하던 슈크렐리는 자신의 이름 앞에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놈’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되었다. 슈크렐리는 미국 내 비호감 인물 1위로 등극하며 수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다라프림이 필요한 환자들의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약은 여전히 비싸고 내 손 닿는 곳 너머에 있는 것이다.
먼 나라의 얘기만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 제약사 게르베는 간암 색전술에 쓰이고 있는 조영제 리피오돌 약가를 500% 인상해주지 않으면 국내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다라프림은 62년, 리피오돌은 64년 전에 만들어진 약이다. 높은 약가와 독점권을 정당화시키는 ‘연구개발비’ 탓을 하기엔 민망하리만치 오래된 약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제약사들이 높은 약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가. 답은 하나다. 독점권. 나만 생산할 수 있는, 나만 공급할 수 있는, 그리고 당신에게는 그것만이 당신을 살릴 수 있는 약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적정’한 약값은 얼마일까? 과연 그 적정한 약값을 당신과 내가 협상할 수 있을까?
최근 트럼프는 ‘공정한’ 약값을 이야기했다. 지금 진행 중인 한미 FTA 재협상에서도 특허 신약에 대해 ‘공정한’ 약가를 주장할 것이다. 정부도 이에 발맞춰서인지 최근 ‘적정한’ 약값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정성’이나 ‘공정성’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다. 다라프림은 2010년까지 1달러였으나 현재 750달러가 되었고, 리피오돌은 2012년 5,000원 정도였으나 이제는 26만원을 눈 앞에 두고 있다. 5,000원과 26만원 사이, 공정한 선은 아마 그 사이 어디 즈음일 것이라 상상하겠지만 이미 그 선은 우리의 손 너머에 존재한다.
제약자본이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의약품을 연구 개발할 수 있도록 더 강력한 독점권과 더 높은 약가를 챙겨줘야 한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은 그래서 위험하다. WTO, FTA, TPP 등을 거치며 의약품 특허권은 점차 강화되고 약가는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 최근 개발되고 있는 면역 항암제들은 수 백 만원을 호가하며 심지어 5억이 넘는 신약도 우리 문턱에 놓여있다. 신약 개발 인센티브라는 명목으로 보장받은 독점권은 제약자본에 의약품 한 개당 수조원의 매출을 올리게 해주고, 다시 이 돈은 돌고 돌아 더 비싼 약을 창출하는데 이용된다. 이제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결과는 이익률 20%를 상회하는 제약자본의 찬란함과, 매년 늘어나는 약제비를 감당 못하는 환자와 각 국가들의 애처로운 날개 짓이다.
그러니 더 이상 적당하게 약가를 보상하여 환자의 생명을 살리고 보자는 이야기는 그만두자. 이번의 적당한 협상은 다음 번에 나올 신약의 고가를 합리화시키고 이는 또 다른 환자의 눈물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제약 자본의 독점권을 지고지순한 가치인 양 인정하고 들어가는 협상장에서는 승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 정부에게는 환자를 위협하는 독점권은 언제라도 해체할 수 있다는 신념을, 우리 모두에게는 제약자본의 뻔뻔한 칼놀음에 대한 분노를, 기대해본다.